남산의 부장들
2019년 한국영화
감독 : 우민호
원작 : 김충식
출연 : 이병헌,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
김소진, 김홍파
한국 현대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던 1979년 10월 26일 사건 이른바 '10.26 사태'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든 두 번째 영화가 등장했습니디. 첫 번째 영화는 2005년에 개봉된 '그때 그 사람들' 이라는 영화였고, 이번에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져 개봉되었습니다.
한석규, 백윤식이 주연한 '그때 그 사람들'은 그날 벌어진 사건위주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고, 따라서 그날 하루의 상황에 대한 비중이 높습니다. 심수봉을 연기한 김윤아(자우림)의 비중도 제법 높았고. 반면 '남산의 부장들'은 김규평(역사속 김재규 역할, 이병헌 연기)이라는 인물위주로 전개가 됩니다. 10월 26일 사건은 굉장히 짧게 다루어지고 있고, 그 사건이 벌어지기 40일전부터의 상황, 즉 '사건의 배경과 원인'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건을 주동한 인물이 김재규였으니 그를 주인공으로 영화가 따라가고 있지요.
영화에서 정치적 선동이나 편향은 어느 정도는 절제한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원작 기록서가 바탕이 되었고, 김규평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 인물의 심리와 상황으로 전개를 하면서 정치적 논란을 최소화 시키려고 합니다. 다만 전두환 전 대통령을 생각외로 비중을 두면서(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암시가 그때그때 등장함) 일종의 탄식같은 결말, 즉 10.26 사건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대통령에게 정권이 넘어가버린(이런 걸 죽 쒀서 개줬다 라는 속담이 적용되어야겠죠)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이건 사실 보너스죠)
영화는 굉장히 진지합니다. 보통 한국영화에서 무거운 소재라도 일부러 유머코드를 넣어서 재미있게 만드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것을 배제하고 꽤 진지하게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병헌의 묵직한 연기는 이런 분위기를 더욱 잘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정치드라마나 역사영화가 장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데 이 영화는 그런 단점을 최소화시키고 있습니다. 김규평이라는 인물 본위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 처럼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면서 이사람 저사람 이야기를 다 같다 붙이는 것 대신 특정 1인의 '고백서' 같은 느낌이 들도록 1인 중심으로 펼쳐나가기 때문에 장황하지 않고 오히려 상당히 날씬한 영화가 되었지요. (핵심 등장인물도 딱 4명에 불과합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그래서 하루의 이야기에 집중을 했고, 이 작품은 40일이라는 시간속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겁고 다소 심심할 수 있는(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뭐 특별히 새로운 것이 튀어나오는 반전 같은 것은 없죠) 내용임에도 영화가 초반부터 매우 흥미로운 이유는 아무래도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힘 입니다.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느낌의, 감정선 하나하나까지 전달되는 느낌을 주는 이병헌의 연기는 힘과 절제가 느껴지면서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나라 연기자 중에서 최소한 그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연기로는 절대 깔 수 없는 몇 안되는 배우답게 그는 거의 스크린을 장악하는 주인공으로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이런 타고난 연기때문에 스캔들의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한국의 대표배우로 살아남았던 것이 이병헌이었고, 그 계기가 된 영화가 바로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이었는데 그런 우민호 감독과 다시 손잡은 것입니다. 우민호 감독이 위기에 빠진 이병헌을 구원해준 은인인 셈인데, 어쩌면 이번에는 '마약왕'의 실패로 위기에 빠진 우민호 감독을 견인해주는 역할을 이병헌이 맡게 될 것 같습니다.
곽도원은 김형욱이라는 박정희 정권속의 악독하고 무자비한 인물의 캐릭터로 잘 어울려 보였는데 다만 그의 이미지나 덩치를 활용하여 악역 포지션으로 좀 더 활용했으면 좋았을 것을 약간은 개과천선한 준 선역처럼 다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유신과 함께 완전히 팽 댱한 그가 중앙정보부장시절에는 엄청 악명이 높았고 부정축재도 많이 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설입니다. 물론 그가 실제로 프레이저 청문회를 통해서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했고, 회고록까지 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 청문회는 77년에 열렸고, 10.26 사태까지 2년여가 걸렸지만 영화에서는 약 40일 전의 사건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역은 과거 독고영재를 비롯해서 많은 닮은 배우들이 연기했는데(그때 그 사람들 에서는 송재호가 연기, 가장 안 닮은 편) 이번에는 이성민이 연기합니다. 외모가 약간 닮은 부분도 있고(왜소한 몸집이지만 매서운 부분이 있는) 억양을 많이 흉내낸 느낌입니다. 라디오 드라마 '격동 30년'에서 들었던 억양과 많이 비슷하더군요. 공교롭게도 이성민은 자신의 영화 두 편이 함께 개봉되어 경쟁을 하는 셈인데 '미스터 주: 사라진 스파이'와 흥행경쟁을 벌이는 상황입니다. 이건 '백두산'과 '시동'으로 경쟁을 벌인 마동석과 동일한 케이스 입니다. 그리고 '백두산'과 '남산의 부장들'이 모두 이병헌 주연 영화이니 이것도 참 우연스럽네요. 이성민의 연기도 좋지만 그럼에도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이병헌에 비하면 많이 불리한 상황이 맞습니다. 이병헌은 자기 마음대로 영화속 캐릭터를 선정할 수 있고 그가 연기하면 그게 바로 캐릭터가 되지만(즉 김재규를 흉내낼 필요가 없는데) 이성민은 박정희 흉내를 철저히 내야 하기 때문이지요. 김재규와 전혀 비슷하지 않은 이병헌은 그냥 영화속 독창적 캐릭터로 인정될 수 있지만 누가 연기하든 '박정희 대통령'연기는 얼마나 실제와 닮았냐가 항상 화두가 되니까요. 외국인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냥 18년간 철권 통치를 한 국가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얼마나 그럴싸한가만 볼텐데.
의외의 변신은 조연 두 배우입니다. 경호실장 곽상천 역의 이희준은 역사속 차지철 역할인데 다소 싱겁고 서글서글한 느낌을 주는 이희준이 어떻게 연기할까 궁금했는데 이런... 완전 평소와 다른 이미지로 변신했더군요. 이희준이 그렇게 거구로 느껴진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체중을 20kg은 불린 것 같습니다. '바이스'의 크리스찬 베일 수준만큼의 변신은 아니지만 이희준이 이런 덩치가 크고 위압적인 캐릭터로 변신했다는 것이 의외입니다. 실제 차지철은 진보/보수 양쪽에서 모두 욕먹는 인물이었던 만큼 이 영화에서도 가장 악역 포지션이고 상당한 밉상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 이기붕, 박정희 대통령의 오른팔 차치절, 만약 역사속에서 이 두 간신이 없었다면 두 대통령의 운명도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김소진은 이전에는 수수한 역할로 많이 기억됬는데 이번에는 세련된 로비스트 역할입니다. 역시나 기존 이미지와 많이 다르더군요. 여자 스파이 같은 느낌. 이런 걸크러쉬 같은 느낌이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제법 능숙한 영어연기도 하더군요. 발음이 좋은 편이라서 캐스팅되었는지 모르지만. 물론 이 영화에서 가장 영어를 많이 사용하는 한국배우는 이병헌입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에도 제법 출연했으니 뭐 영어연기가 그리 낯설지는 않지요. (일본어도 한마디 하더군요. 이 영화에서 무려 3개국어를 한 셈이죠)
배우들이 나름 잘 이끌어가서 괜찮게 뽑혀져 나온 영화가 된 느낌입니다. '내부자들'만큼의 성공은 못하더라도 '마약왕'같은 처참한 실패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백두산'에 이어 400-500만 정도의 흥행만 하더라도 이병헌은 '믿고 보는 배우' 타이틀을 좀 더 오래 유지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백두산'보다 나은 느낌입니다. 정치영화지만 정치적 논란도 최소화하도록 만든 것 같고.
김영삼 전 대통령, 전두한 전 대통령, 졍승화 참모총장 등 역사속 중요한 인물들도 등장하거나 거론되는데 특히 정승화 총장은 실제 인물과 이미지가 많이 비슷해 보였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등장하지 않고 거론만 몇 번 되고, 전두환의 경우는 영화의 결말을 암담/허무하게 만드는 의미있는 캐릭터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정승화 총장과 달리 야심을 느러내는 부분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 자극적이지도 그리 가볍지도 않게 많이 알려진 역사속 사건을 제법 진지하게 잘 그려낸 영화로 평가합니다. 팩션영화인 만큼 이것저것 욕심을 부릴만 한데 그런 무리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10.26의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해서만 나름의 창작력을 발휘해서 영화스럽게 다루고 있고 10월 26일 그날 연회에 참여했던 두 여성의 비중은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김규평을 주인공으로 그와 주변인물과의 관계 위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적인 느낌이 좀 강했던 부분은 영화 전체가 '도청전쟁'으로 진행되는 부분입니다. 실제는 어느 정도까지 였는지 모르겠네요.
'백두산'의 독주 속에서 이어진 겨울 극장가였는데 자연스럽게 흥행의 바톤을 넘겨받을 전망입니다. '히트맨' '미스터주: 사라진 VIP'가 왜 같이 개봉했는지 이해가 안되지만 아마도 의미없는 흥행 1위보다 '4일연휴'에 묻어가는 2등 전략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큰 흐름은 논픽션으로, 세세한 부분은 픽션으로 다루어진 느낌인데 실제와 영화의 차이를 나름 정리해서 설명한 영상이 있으니 그걸 참조하면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병헌의 묵직한 열연과 우민호 감독의 과한욕심 없는 전개가 돋보였던 볼만한 영화입니다.
ps1 : 영화속 내용과 실제를 비교한 유튜브 영상은 아래 링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AzhcnKarNU
ps2 : 경호실장이 무소불위의 2인자 노릇을 하며 국회의원 조인트를 까던 당시와 비교하면 정말 세상 좋아진 것 같습니다. 지금 그랬다간 난리나겠죠.
ps3 :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큰 시민시위였던 부마항쟁도 슬쩍 다루어집니다.
ps4 : 김재규와 차지절의 극심한 대립은 실제 그랬다고 알려졌죠. 영화에서처럼 총구를 겨누면서 싸우진 않았더라도.
ps5 : 네이버 인물정보에는 왜 김형욱의 사망일이 1984년으로 나와 있을까요?
ps6 : 요즘 김홍파 배우 참 많은 영화에 얼굴을 비추는군요. 이경영 능가수준입니다.
ps6 : 여담이지만 오래전에 친구가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을 풀이하면서 18년 통치하고 부하에게 당할 운명이라고 그럴싸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우선 성씨인 박(朴) 을 보면 왼쪽이 나무목자인데 나무목 자는 열십(十)자와 여덟 팔(八) 자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1961년 5.16으로 정권을 잡고 79년 10.26으로 정확히 18년간 1인자 였으니 성씨인 박자와 일치하지요. 가운데의 정은 바를 정(正) 인데 그 글자는 한 일(一) 자와 그칠 지(止) 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즉 일순간에 그치게 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죠. 무소불위 철권 통치가 정말 일순간에 끝나 버렸죠. 이름의 끝자인 희는 빛날 희(熙)인데 그 글자의 윗부분이 신하 신(臣)자와 자기 기(己) 가 결합되어 있지요. 즉 자신이 아끼던 신하에 의해서 죽게 된 다는 해석입니다. 즉 박정희(朴正熙) 라는 한자이름은 "18년간 통치하다가 일순간에 끝나는데 자기가 아끼던 신하에 의해서다)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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