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2003년 한국영화
감독 ; 봉준호
출연 : 송강호, 김상경, 송재호, 전미선
김뢰하, 변희봉, 고서희, 류태호
박해일, 박노식
최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밝혀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은 현재 처제를 성폭행 살해하고 수감중인 50대 흉악범이며 94년에 범행을 저지르고 잡혀 25년을 수감중인 인물입니다. 그가 진짜 화성살인사건 범인인지는 모르지만 과학수사를 통한 결정적 증거가 있어서 현재 매우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그는 모범수로 조만간 가석방될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화성사건 범인으로 확정된다면 영원히 감옥에서 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공소시효가 지나서 화성사건으로 추가 기소나 처벌은 어렵지만 무기수인 그를 가석방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는 있기 때문에 사실상 종신형을 살게 되겠지요.
화성시 연쇄 살인사건은 1986년 9월 15일 첫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이어 1991년 4월 3일까지 모두 10차레에 걸쳐서 여성들을 살해한 미제 사건이었습니다. 몇년 간에 걸쳐서 발생한 이 사건으로 화성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최대규모의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결국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첫 사건 이후 33년만에, 마지막 사건 이후에 무려 28년만에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한 것입니다.
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바로 봉준호 감독의 출세작 '살인의 추억'으로 200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신인감독이던 봉준호 감독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했고, 그 전에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두 번째 영화인 '살인의 추억'을 만들면서 당시 흥행배우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송강호를 주연으로 캐스팅하였는데, 두 사람의 인연이 나중에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무명배우시절 송강호는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낙방했는데 그때 오디션 심사위원 중 한 명인 봉준호 감독의 격려 문자를 받고 힘을 얻었고, 나중에 이 사람과 꼭 영화를 같이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유명배우가 된 이후에 이제 두 번째 작품을 만드는 무명의 감독 봉준호의 연락을 받고 흔쾌히 출연을 수락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 미담은 현재 국내 최고 흥행배우와 국제적인 감독으로 부상한 두 사람간의 특별한 인연으로 널리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1986년 화성에서 한 여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되고 지역 겸찰인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와서 현장을 살피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길, 살해되어 유기된 시체는 옷이 벗겨져 있고, 손발이 뒤로 묶여 있었습니다. 이 사건 해결을 위해서 서울에서 젊은 형사 서태윤(김상경)이 파견을 나옵니다. 반장(변희봉)과 박형사는 마을의 정신 지체장애인 백광호(박노식)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가짜 증거까지 만들어서 그에게 진술을 강요하고, 마치 범인을 잡은듯이 기념사진까지 촬영합니다. 하지만 서태윤 형사는 그런 황당한 범인조작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결국 이 무모한 범인조작쇼는 금새 막을 내리고 반장이 경질됩니다. 새로 부임한 신동철 반장(송재호)은 다시 수사를 시작하는데 계속해서 연쇄 살인이 벌어지지만 범인에 대한 단서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초저녁에 변태행위를 하던 조병순, 범행이 발생하던 날 매번 유재하의 음악을 신청했던 박현규(박태일) 등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가혹한 강압조사를 하지만 결국 범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허무한 결말만 남기고 급기야 목격자로 인정받아 취조를 하려던 백광호가 겁에 질려 도망치다 열차사고로 죽게 되면서 경찰들의 삽질은 극에 달합니다.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과정을 다루고 있는 범죄 드라마였지만 기존 수사극과는 달리 치밀하거나 과학적인 수사보다는 투박한 시골경찰의 단순 무식한 황당 수사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이 끔찍한 살인사건을 얼마나 엉성한 수사로 갈팡질팡 했는지, 그리고 용의자를 억지로 만들어 불법구금, 구타를 하며 강압적으로 강제 진술을 하게 만들기도 하는 등 시골 경찰의 무능함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서형사는 처음에는 이들에게 이질감도 느끼고, 나름 이성적으로 행동했지만 연쇄살인이 계속 발생하고 범인을 잡지 못하자 나중에는 오히려 지역 경찰들보다도 더 광적으로 변하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일종의 범인을 잡지 못한 무기력함 때문에 폭발하는 형사의 괴로운 심리도 잘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기존 범죄영화나 수사극에서 보여지는 스릴이나 액션, 통쾌함, 반전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과 수사과정의 문제점 위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실제로 발생한 미제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답답하고 안스러운 내용이 많이 전개됩니다. 영화적인 긴박감을 높이기 위해서 비가 오는 날 붉은 옷을 입은 여성들을 살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실제 사건에서 그런 경우는 2차례 정도였다고 합니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넘버3' 등 여러 흥행작에 출연한 송강호는 '반칙왕'에서 단독 주연으로도 충분히 흥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 '살인의 추억'을 통해서 본격적인 흥행 브랜드 배우로 발돋움하면서 현재까지 굳건히 흥행배우로 관록을 과시하며 2019년에도 천만관객영화에 출연했는데, 그 영화 '기생충'은 바로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의 인연은 이 '살인의 추억'으로 시작되어 이후 '괴물' '설국열차'를 거쳐 '기생충'까지 오래 이어진 것입니다. '살인의 추억'에는 당시 27세의 젊은 배우 박해일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청년으로 등장하는데 박해일도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 비중있게 출연하는 등 이후 배우로서 꽃길을 걸으며 주연배우로 부상했고 '이끼' '제보자' '최종병기 활' 등 흥행작들에 주연으로 출연했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공동 주연한 김상경은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로 투박한 시골경찰 송강호와 사사건건 대립하다거 결국 닮아가며 본인도 범인에 대한 집착으로 무리한 행동을 하는 역할을 합니다.
2003년 개봉되어 서울관객 190만명 전국관객 525만명을 기록하는 대흥행을 하며 그해 흥행 1위에 올랐고, 지금보다 개봉관 스크린수가 절반에 불과했던 당시로서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기록에 조금 못 미칠 정도로 대단한 성공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일약 이 영화로 흥행감독으로 급부상했고 이후 '괴물'로 1천만 관객동원을 하며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영화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며 오늘날 거장의 자리에 오르는 든든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경찰을 그만두고 사업가로 변신한 송강호가 20여년만에 다시 첫 살인의 그 현장으로 와서 해결되지 못한 과거 사건을 추억하는 내용이 보여지는데, 지나가던 한 여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살인범도 그 현장에 다녀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렇게 추측했지만 실제 범인으로 유력한 용의자가 94년에 잡혀 수감되었으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봉준호 감독은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있는 연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건과 범인의 특징에 대해서는 나름 꽤 많이 알고 있는 셈이고, GV시사회때도 범인이 영화를 보러 올 것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간담회 도중 '범인은 B형이고 이곳에 와 있을 것이다. 지금 이곳 문을 잠그고 여기 있는 분중 71년 이전에 출생한 분들의 혈액을 채취하면 범인의 DNA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기 누구 밖으로 나가시는 분이 있네요'라는 돌출발언으로 당시 간담회에 온 관객을 일순간 서늘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B형으로 범인이 알려지 있었지만 현재 용의자로 잡힌 수감자는 O형이라고 합니다)
2003년까지 미제사건인 이 연쇄 살인사건은 불과 며칠전까지도 미제사건이었습니다. 16년이 더 지난 2019년에야 유력한 용의자가 밝혀졌는데 DNA일치 외에도 여러가지 유력한 정황이 많습니다. 우선 화성연쇄살인사건이 2001년 이후에는 발생하지 않았는데 용의자가 93년 충북 청주로 이사를 갖고 이후 94년에 체포되었으니 나름 범행이 멈춘 시기와 일치를 하는 셈입니다. 94년부터 그가 계속 교도소에 있었으니 추가 범행은 더더욱 불가능했고. 연쇄살인자의 특성상 범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성향이 있고. 그리고 수감된 이유가 처제 성폭행 살인사건이었으니 과연 연쇄살인마 다운 범행이지요. 물론 교도소에서는 1급 모범수였고, 동료들조차 매우 얌전한 사람이라는 증언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처제를 성폭행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사실이니 연쇄살인범으로 지목받을만 한 흉악범인것은 맞습니다. 모범수였기 때문에 이번에 용의자로 지목받지 않았다면 가석방이 곧 되었을 수도 있는 만큼 가슴을 쓸어내리신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2000년대 한국영화의 명작으로 평가받았던 '살인의 추억'은 이렇게 진범으로 유력시되는 용의자가 등장하는 바람에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렇듯 미제사건이나 미해결 부분이 영화 개봉후에 밝혀지는 경우가 드물게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이태원 살인사건'입니다 그 영화도 범인을 확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영화 개봉 후 몇 년뒤에 결국 범인을 지목해서 재판을 했고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런 사건과는 다르지만 송강호 주연의 '택시운전사'가 개봉된 이후로 신원이 정확하지 않았던 당시의 택시운전사가 김사복씨라고 하고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맞다는 사실확인을 통해서 비로소 그 인물에 대한 정확한 사실관계가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빠르게 흘러가지만 그런 와중에 속속들이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들도 있습니다.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묻힐 뻔 했던 '살인의 추억''은 결국 30여년만에 그 진상이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것이지요.
ps1 ; 고 전미선 배우가 송강호의 연인이자 마을에서 야매치료를 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ps2 : 5년간에 걸쳐서 발생한 10건의 사건이었지만(8번째 사건은 모방범죄로 밝혀짐) 영화에서는 몇 달 정도의 기간처럼 느껴지게 다루고 있습니다. (형사 한 명이 5년씩 파견나올리도 없고)
ps3 : 당시 '화성'에 산다고 하면 마치 연쇄살인이 벌어진 지역에 사는 것처럼 많이들 인식했는데 사실 화성은 굉장히 넓은 지역입니다. 같은 화성에서 화성시청을 가는데만 차로 1시간 가까이 걸릴 정도로. 화성은 크게 동부와 서부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화성시청이 있는 서부지역은 해안가에 비교적 가깝고 공장지대가 많은 지역으로 서해안 고속도로 라인이고, 동부 지역은 동탄신도시가 위치하고 수원, 오산에서 더 가까운 도심지역입니다.
ps4 : 만인이 극찬해 마지않는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다소 과대평가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중에서는 '괴물' '기생충' '설국열차'를 더 좋아합니다.
ps5 : 밥은 먹고 다니냐? 라는 명대사(?) 가 후반부에 등장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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