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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난징대학살 일본 731 부대 이야기 / 이시이 시로

호기심을 품고사는 중 2020. 12. 27. 00:30

학살 사건 - 난징 대학살

생체 실험 - 731 부대

난징 대학살

1937년 12월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하며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화민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인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지금까지도 중일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로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명 정도이다. 일본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에선 한 학자가 약 9만 명 정도가 살해당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만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20~30만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난징 한 곳에서만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

양쯔강 주변은 살고 싶은 수십만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이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일본군은 이들을 집중공격하여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다. 12월 13일 오전 4시에 난징의 정부청사가 함락되면서 난징은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이 순간 탈출하지 못한 25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과 10만 이상의 패잔병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가솔린을 붓고 총을 쏘아 불을 붙이거나,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에 밀어 넣어 얼어죽게 만들고 일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기도 했으며, 이유없이 어린아이를 전깃줄에 목을 매달았다.

장작더미위의 나무 기둥에 묶고 사람이 완전히 익을 정도까지 불로 태웠으며 소년에게 염산을 부어서 죽여버리거나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어 가지고 놀았으며, 100여명의 사람을 묶고 코와 귀를 잘라내었다는 증언들도 쏟아진다.

난징 밖에 있는 연못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컬러 사진으로 찍었으면 더욱 섬뜩했을 것이다. 포로들에게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파게하고, 포로는 그 구덩이 앞에 꿇어앉아 머리가 잘리었다. 많은 일본군은 칼 솜씨가 아주 좋아 칼이 내리치는 순간 머리가 떨어지고 몸은 저절로 구덩이로 떨어진다.

상해에서 난징까지의 도처에서 여자 음부에 대나무 작대기를 쑤셔 넣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상관은 우리에게 여자를 강간한 후 죽여야 한다. 되도록 때려 죽여라. 총과 총검으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일본 종군 사진기자의 증언

주씨 할아버지 집에 일본군이 들이닥쳐 40세의 주씨 며느리를 강간했다. 그녀의 시아버지, 남편,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이 끝난 후 일본군은 60여세의 주씨에게 며느리를 강간하라 했다. 주씨 할아버지는 며느리 몸에 엎드려 그 짓을 하는 체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를 마구 때리며 진짜로 하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자기 며느리를 강간했다. 다음, 그들은 17세 된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라 명령했다. 아들도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박옥상, '남경대학살'

임신 6개월의 19세 임산부 리슈잉은 일본군에게 배를 찔려 유산하고 얼굴에 18차례 칼을 맞았으며 37곳을 찔려 봉합했다. 이 일을 일본 사령관에게 항의 했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말만 들었고, 아사히 신문기자조차 '피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방임했다.

난징 대학병원 외과의사 로버트 윌슨이 환자 '리슈잉'에 대해 아내에게 쓴 편지

(당시의 실제 기사) 100인 베기 초기록(엄청난 기록),

무카이 106 노다 105,

양소위 거기에 연장전.

중국인 포로나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총검술 연습이나 목베기 시합에 사용된 것. 여기서 일본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10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다시말해 100인 참수 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무슨 스포츠 시합 중계하듯 이 베기 시합을 대서특필했다는 것이다.

난징 대학살 그 후

이런 광란의 6주간이 지나고, 1938년 봄에야 대학살은 종결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생체실험같은 일들은 있었다.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는데 당시의 주석인 마오쩌둥은 호기롭게 "우린 승전국이니 배상 따위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에선 중국에 배상금으로 최소 500억 달러는 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 총리가 중국에 방문하고 배상금 문제까지 땡처리했단 뉴스를 들은 온 중국이 경악에 휩싸였고, 특히 난징은 온 도시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울음바다가 되어, 항의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2015년 10월 10일, 난징 대학살 관련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이리스 장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

중국계 미국인 2세인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이 책은 서구 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장은 특유의 논리적인 말빨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 대사를 생방송으로 캐박살내며 미국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상당수의 자료들이 이 책을 인용한 것이다.

731 부대

731 부대 본부 전경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포함한 생화학무기 개발 등의 업무를 하던 일본제국 소속 육군 부대로 하얼빈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관동군 검역급수부 본부(関東軍検疫給水部本部)"이다.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부대로도 알려져 있다. 1936년에 설립되어 일본 제국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 활동했다.

생체 실험의 대상, 마루타

 

이러한 생체 실험의 대상을 '마루타'(뜻: 통나무)라고 불렀다. 희생자 중에서는 전쟁 포로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조선인, 몽골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소련군, 미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끌려가 희생되었다.

실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아있는 실험체에 탄저균, 천연두균 등의 바이러스균을 주사하여 결과를 지켜보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해부하여 내장을 빼내거나 심지어 동물의 내장과 교체하는 실험도 하였다. 그리고 포로의 대량 처분에 독극물을 쓰면 돈이 들기에 어떻게 빠르게 대량학살을 하기 위한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사람을 저진공에 집어넣어 죽이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수용자는 마취 없이 생체 반응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을 당했다.

731부대 내규

도야마 공원 근처 당시 군의학교 731부대 지하연구실 입구 추정지

물의를 일으키거나 탈주를 시도한 수용자는 24시간 이내에 실험을 종료시킨다. 이 때문에 수용자가 폭동을 일으킬 경우 아예 학살을 하기도 했다.

731부대의 모든 구성원(부대지휘관 포함)은 731부대에 몸담고 있는 도중에 사망하면 그 시체는 생체실험 비교자료를 얻기 위해 부검된다.

어떠한 경우라 해도 수용자는 석방시킬 수 없다. 실험이 종료된 이후의 수용자는 살아있든 죽었든 간에 무조건 소각 처리한다.

만약 적과의 교전에서 패배 또는 기타 다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731부대를 해체해야 할 경우에는 모든 수용자를 정리해야 한다. 여기서 정리란 수용자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국 "정리"가 실현되었다. 7동의 마루타들은 청산가스로 살해하고 8동의 마루타들에게는 자살을 강요했다.

남성 마루타들은 2명씩 짝을 이뤄서 서로 로프 고리 속에 목을 넣고 로프 중간에 곤봉을 끼워서 두 명이 합해 돌리는 식으로 자살을 시켰다.

여성 마루타들은 목을 매게 했는데 문의 손잡이에 로프를 매단 바람에 신체를 오그리고 발을 오그리는 식으로 죽어야 했다.

수용자의 탈주를 도와준 731부대원은 직위 해제는 물론이고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사형 또는 이에 준한 형벌을 받는다.

처음 전입한 신병은 수용자 중 가장 품질이 떨어지는 수용자를 때려 죽여야 한다. 이는 수용자를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731 부대가 작성한 논문

일본 의학계는 731부대 관계자들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731부대가 작성한 여러 논문이 있는데, 이 가운데 731부대 시절에 작성한 육군 군의학교 방역 연구 보고 게재 논문을 학위 논문으로 그대로 제출해 통과한 사람도 있었다.

조직 내에 있는 페스트균 염색법에 관한 연구(게이오, 1946)

파상풍과 키소이드의 예방적 효력에 대해(구마모토, 1946)

이질균 분류에 대해(구마모토, 1946)

장기 손상의 후유 기능 장해에 대해(도쿄, 1947)

뇌척수액 당량의 변화에 대한 연구(니가타, 1949)


 

<설민석사과>

설민석은 세계사 오류 논란이 계속되자 지난 23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안녕하세요 설민석입니다'라는 제목의 사과 영상을 올렸습니다.

설씨는 해당 영상에서 "지난 2화 클레오파트라 편에서 제가 강의 중에 오류를 범했고, 그 부분을 자문위원께서 지적해주셨다"며 "제 이름을 건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모든 잘못은 저한테 있다고 생각한다. 제가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생긴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앞으로 여러분의 말씀을 '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여기고 성실하고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다"며 "이번 일로 불편해하셨던 분들, 그리고 걱정해주셨던 많은 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덧붙였습니다.